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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3월

파리,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 Au Revoir Paris

파리에 도착한 첫날, 트로카데로 광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에펠탑이 눈앞에 있었다. 사진으로 수백 번 봤던 그 탑이, 실제로 내 앞에 서 있었다. 설렘이란 이런 것인가 — 가슴 어딘가가 묵직하게 눌리는 느낌. Bonjour, Paris.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바라본 에펠탑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바라본 에펠탑
샹 드 마르스 공원의 에펠탑
샹 드 마르스 공원의 에펠탑

🏛️ 개선문 — 올라가본 자만이 안다

에투알 개선문은 멀리서 보는 것과 직접 오르는 것이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나선형 계단을 300개 넘게 오르고 나서야 마주하는 파리의 파노라마. 샹젤리제 거리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그 장면 앞에서, 다리가 풀렸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 도시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중심에서 모든 것이 뻗어나가는 구조.

에투알 개선문
에투알 개선문

🗼 에펠탑 — 시민이 지켜낸 철의 기념물

에펠탑을 왕이 지시해서 세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 않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시민 공모로 설계됐고, 원래는 20년 뒤 철거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은 이 기묘하고 거대한 철골 구조물을 없애기를 거부했다. 민주주의가 건축물을 구한 셈이다. 샹 드 마르스 공원에서 올려다본 에펠탑은 그래서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 루브르 · 오르세 · 퐁피두 — 미술의 수도

루브르 앞 유리 피라미드는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다. 그 아래에 40만 점의 유물이 잠들어 있다. 모나리자 앞에는 항상 인파가 몰려 있다. 생각보다 작은 그림 앞에 수백 명이 서 있는 광경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다. 다빈치가 이 장면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루브르의 모나리자
루브르의 모나리자

조르주 퐁피두 센터는 건물 자체가 도발이다. 배관과 에스컬레이터를 건물 바깥으로 꺼내 놓은 설계. 내부를 완전히 비워 전시 공간을 극대화하겠다는 발상. 파리가 왜 현대미술의 수도인지, 건물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조르주 퐁피두 센터
조르주 퐁피두 센터

💎 생트 샤펠 · 팔레 가르니에 — 빛과 소리의 건축

생트 샤펠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1,113개의 유리 패널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성당 전체를 물들이는 순간, 숨이 멎는다. 팔레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는 그 화려함이 지나쳐 처음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 보면 이 과잉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생트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생트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팔레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
팔레 가르니에 오페라 하우스

📚 예술 제본 ·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 책의 도시

파리가 나에게 가장 특별했던 이유는 책이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은 센강 바로 옆에 있다. 헤밍웨이, 제임스 조이스, 조지 오웰이 드나들던 그 공간. 낡은 책들이 천장까지 빼곡히 쌓인 서가 사이를 걷다 보면, 문학이란 게 공간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

예술 제본 공방도 빠뜨릴 수 없다. 가죽으로 장정한 책 한 권에 500유로. 처음엔 터무니없다 싶었는데, 직접 보고 나면 이해가 된다. 마블링 문양의 면지, 금박으로 새긴 제목, 수백 년을 버티도록 만든 바인딩. 이건 책이 아니라 공예품이다.

파리의 예술 제본 고서들
파리의 예술 제본 고서들

📖 BnF 리슐리외 — 지식의 신전

프랑스국립도서관 BnF 리슐리외 분관의 열람실은 사진으로 봤을 때와 실제가 완전히 다르다. 뻥 뚫린 천장, 4층 높이의 책장, 그 아래 조용히 앉아 공부하는 사람들. 나도 태블릿을 꺼내고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다. 이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 것도 안 해도 충분한 느낌이었다.

BnF 리슐리외 열람실
BnF 리슐리외 열람실

🏰 베르사유 · 앵발리드 · 몽마르트르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광대해질 수 있는지를 정원으로 증명한 공간이다. 앵발리드의 황금 돔 아래에는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면 파리 전체가 발 아래 펼쳐진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흰 돌은 어떤 날씨에도 빛난다.

베르사유 궁전 정원
베르사유 궁전 정원
앵발리드 돔 내부 — 나폴레옹의 무덤
앵발리드 돔 내부 — 나폴레옹의 무덤
몽마르트르 사크레쾨르 대성당
몽마르트르 사크레쾨르 대성당

🍽️ 먹고 마시는 파리

에스카르고는 생각보다 맛있다. 달팽이라는 선입견을 내려놓으면, 버터와 마늘이 잘 밴 부드러운 식감이 남는다. 바게트는 파리에서 먹어야 진짜다. 크레페는 길거리에서 손에 들고 먹는 게 정답이다. 1일 1 와인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파리에서는 혼술도 품위 있어 보인다.

에스카르고 —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 — 달팽이 요리

🏙️ 라데팡스 · 파리의 스카이라인

몽파르나스 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파리는 에펠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도시였다. 현대와 고전이 공존하는 스카이라인. 라데팡스의 신개선문은 구 개선문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파리는 우연이 없는 도시다.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고, 그 계획이 아름답다.

라데팡스 신개선문
라데팡스 신개선문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바라본 파리 전경
몽파르나스 타워에서 바라본 파리 전경

Au Revoir, Paris

파리를 떠나는 날 아침, 센강변을 마지막으로 걸었다. 강물은 어제와 같이 흐르고 있었고, 노점상들은 오늘도 고서를 늘어놓고 있었다. 누군가 길을 물어봤고, 나는 서툰 몸짓으로 답해줬다. 이 도시는 여행자에게 관대하다.

파리는 크지 않다. 하지만 깊다. 골목 하나하나에 이야기가 있고, 돌 하나하나에 역사가 있다. 다음에 또 오게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 채로, 비행기에 올랐다. Au revoir, Paris.


20 3월

도쿄, 10월의 기록 — 2024

10월의 도쿄는 애매한 계절이다. 단풍이 들기엔 이르고, 벚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이 계절의 도쿄는 걷기에 딱 좋고, 숨쉬기에 편하다. 이번 여행의 키워드는 네 가지였다. 책과 문구, 오는 문화, 도시의 에너지,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

📚 책과 문구 — 진보초·이토야

진보초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제44회 칸다 고서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노점상처럼 길 위에 늘어선 책들, 그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책장을 넘기는 어르신의 뒷모습이 이 거리의 전부를 설명해줬다. 축제라지만 화려하지 않다. 그냥 책이 있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책을 고르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일본 출판시장도 스마트폰에 밀려 쇠퇴하고 있다지만, 진보초만큼은 그 흐름을 비껴가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그 흐름에 무관심한 것 같다.

진보초 칸다 고서축제 — 책을 고르는 시간
진보초 칸다 고서축제 — 책을 고르는 시간

긴자의 이토야는 진보초와는 전혀 다른 결이다. 12층짜리 건물 전체가 문구점이라는 사실이 이미 하나의 선언이다. 피셔 스페이스펜은 결국 사지 않았다. 무중력 상태에서 쓸 일이 생기면 그때 사기로 했다.

🌉 오는 문화 — 오다이바·도쿄타워

오다이바 해변에 서면 묘한 기분이 든다.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고, 브루클린브릿지와 금문교를 섞어놓은 듯한 레인보우브릿지가 흐린 하늘 아래 걸쳐 있다. 그리고 저 멀리, 에펠탑처럼 붉게 빛나는 도쿄타워.

오다이바 레인보우브릿지
오다이바 레인보우브릿지
도쿄타워 야경
도쿄타워 야경

세계의 좋은 것을 가져다 자기 방식으로 재배열하는 능력. 분재, 수석, 피규어, 미니어처까지 이어지는 맥락을 생각하면 이건 일본인 특유의 감각이다.

🌃 도시의 에너지 — 신주쿠·시부야·롯폰기·긴자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야간에 내려다보면 숨이 막힌다. 신호가 바뀌는 순간 사방에서 쏟아지는 인파. 강남역인지 홍대인지 헷갈릴 것 같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롯폰기 힐스 모리타워 전망대에 올라서면 도쿄의 스케일이 새삼 실감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빛의 바다.

롯폰기 힐스
롯폰기 힐스
도쿄 야경 전망
도쿄 야경 전망

🍜 먹고 마시는 것

여행의 절반은 먹는 것이다. 신주쿠 골목 잇테키야에서 먹은 라멘 한 그릇. 진한 육수에 차슈, 반숙 달걀. 줄을 서서 기다렸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잇테키야 라멘
잇테키야 라멘

츠키지 시장 근처에서 먹은 마구로동은 참치가 밥 위에 수북이 쌓인 채 나왔다. 이것만으로 충분한 한 끼.

츠키지 마구로동
츠키지 마구로동

에비스 맥주 양조장에서는 4가지 맥주를 한 자리에서 맛봤다. 여행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에비스 맥주 양조장
에비스 맥주 양조장

🏯 가깝고도 먼 나라

도쿄에 올 때마다 드는 감정은 복잡하다. 좋다. 그런데 마냥 좋지만은 않다. 역사를 잊지 않으면서도 배울 건 배우는 것. 그게 이 나라를 대하는 합리적인 자세일 것이다.

맛있는 걸 먹고, 맥주도 마시고, 많이 걷고, 많이 봤다. 도쿄타워 불빛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또 오게 될 것 같다, 이 도시에.


20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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